재택의료 : 사람의 병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 [병원이 집으로]

재택의료 : 사람의 병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 [병원이 집으로]

이충형 대한재택의료학회 교육이사(서울봄연합의원 원장)

기사승인 2026-07-09 18:27:03
서사의학이라는 말이 있다. 의학이 단지 병명을 찾고, 수치를 조정하고, 약을 처방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생의학적 모형 안에서 환자는 종종 고혈압, 치매, 척추협착, 배뇨장애 같은 진단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실제의 환자는 진단명들의 묶음이 아니다. 한 사람의 몸에는 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세월과 선택, 상처와 두려움, 지켜온 자리와 끝내 놓지 못한 소망이 함께 깃들어 있다.

오늘 나는 북한산 자락의 작은 암자에 계시는 84세 스님을 일곱 번째 찾아뵈었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그곳에서 스님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보내셨다. 전기와 수도가 들어온 것도 고작 20년 남짓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삶의 편의가 그곳에서는 아주 늦게 도착한 문명의 선물이었다.

스님은 열여덟에 결혼하셨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남편과의 삶을 이어가지 못하고 도망치듯 그 삶을 떠나셨다고 했다. 스물여덟에 출가하셨고, 몇 해 동안 큰절에서 수행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큰스님들이 “여자인 네가 산속 깊은 절에 들어가 이 절을 지키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님은 그 암자를 지켜오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스님을 단지 ‘장기요양 2등급의 고령 환자’로만 볼 수 없었다. 스님은 고혈압과 치매, 자율신경병성 방광, 척추협착을 앓고 계신 분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 사람이었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산속의 작은 암자를 평생 지켜온 사람이었다. 외롭고 긴 세월을 수행과 기도로 견뎌온 한 사람의 삶이 그 작은 암자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스님을 가장 두렵게 하는 증상은 어지러움이었다. 의학적으로 어지러움은 원인을 감별해야 하는 증상이다. 뇌혈관 질환인지, 귀의 문제인지, 약물 때문인지, 경추나 자율신경계의 문제인지 살펴봐야 한다. 다행히 오래전 상급종합병원에서 MRI와 MRA 검사를 받으셨고, 큰 이상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약물을 조정하고 경추 치료를 병행하면서 어지러움의 빈도와 강도도 조금씩 줄었다.

그러나 스님에게 어지러움은 단지 전정기관이나 중추신경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하나뿐인 남동생이 모두 ‘어지러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에게 어지러움은 증상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몸에서 어지러움이 올라오는 순간, 스님은 단순히 균형을 잃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남동생의 마지막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었다. 의학적으로 “큰 이상은 없습니다”라는 말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자의 두려움은 검사 결과지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환자의 외로움은 진단코드로 청구되지 않는다. 환자가 평생 지켜온 삶의 무게는 혈압 수치나 인지기능 검사 점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방문진료는 그래서 특별하다. 병원이 환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병은 더 이상 환자의 전부가 아니다. 병은 한 사람의 긴 이야기 속에 놓인 한 문장이 된다.

우리가 스님께 드리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치료만은 아닐지 모른다. 약을 조정하고, 증상을 확인하고, 필요한 검사를 연결하고, 통증과 어지러움을 줄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스님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속 깊은 암자까지 누군가 찾아와 몸을 살피고,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을 함께 견뎌준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치료의 일부가 된다.

의학은 병을 없애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쓸쓸하게 끝나지 않도록 곁에 머무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병을 완치할 수는 없다. 노쇠를 되돌릴 수도 없고, 치매의 시간을 완전히 멈출 수도 없으며, 오래된 두려움을 단번에 지울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환자의 마지막 장면이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더 존엄하며, 조금 더 따뜻하게 이어지도록 도울 수 있다.

좋은 의사는 병명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은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질병 너머에 있는 한 사람의 생애를 보고, 그 생애가 마지막까지 자기만의 빛을 잃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서사의학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순간에서 시작된다. “어디가 아프세요?"라고 묻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나요?“, "무엇이 가장 두려우신가요?”, “제가 어떻게 곁에 있으면 좋을까요?”라고 묻는 일.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환자는 더 이상 병든 몸만이 아니다. 그는 자기 삶의 이야기를 가진 한 사람으로 다시 서게 된다.